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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 포스터 이하의 내용에는 아노라의 전반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데렐라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꿈에 그리던 ‘왕자님’을 만나서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은 ‘당사자’의 감정만큼 중요한 것이 ‘가문’의 결합이었습니다.
아니 후자가 더욱 중요하다고 대놓고 말해도 아마 크게 반발하거나 부정할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그러한 ‘결혼’이라는 무게감이 현대 사회에는 점점 적절하지 않아져, ‘시민결합’이나 ‘동거’ 또는 ‘다자간 연애’가 발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아노라’는 그럼에도 신데렐라를 꿈꾸는 아노라의 현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노라는 뉴욕에서 ‘스트리퍼’로 일하고 있습니다.
‘삽입 섹스’는 ‘업소’에서 일단 금지이지만, 마음에 들면 몰래 해도 상관없습니다.
이반은 흔한 러시아 재벌가의 망나니 아들입니다.
심심하면 스트립 클럽에 들러, VIP 대우를 받는 것을 즐깁니다.
‘엄빠’의 집에서 ‘엄카’로 돈을 물 쓰듯이 쓰는 한량이라고 하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노라와 이반이 만났습니다.
물론 스트립 클럽에서 만났습니다.
둘은 처음 만났지만, 서로가 마음에 든 것 같습니다.
아노라는 업소에서 섹스를 제안하고, 이반은 아노라를 자기 집으로 계속 호출합니다.
망나니 재벌 2세와 스트리퍼의 만남이라니, 이런 뻔한 소설, 영화, 연극이 또 있을까요?
실제로 둘은 계속 만남을 가지고(물론 섹스를 위해서) 사이가 깊어집니다.
그러다가 라스베가스에서 사이가 깊어진 ‘두 명’은 마치 현대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된 양 즉석 결혼을 해 버립니다.
이반은 정말 아노라와 ‘결혼’을 하고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만, ‘아빠’·‘엄마’에게는 알리지 못합니다.
아노라는 자신이 이반과 ‘결혼’을 한 것은 맞지만, 아직 ‘가족’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하고, 이반을 채근해 보지만 이반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질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이반의 가문의 사용인들은 이반이 ‘진짜로’ 결혼을 한 것을 알아내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집에 방문합니다.
우당탕탕 소동이 일어나고, 이반은 탈주합니다.
말 그대로 도망친 것입니다.
이반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책임질 능력이 없습니다.
아노라는 이대로 이혼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반 가문의 ‘직원’들과 동행하며 이반 찾기에 나섭니다.
아노라 일행이 이반을 찾는 과정은 일체의 생략이 없습니다.
생략 없이 ‘전직 스트리퍼’가 재벌가 ‘남편’과의 이혼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아노라도 이반도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나마 도망친 이반보다는 아노라가 낫다고 해야 할까요?
아노라 일행은 온 시내를 뒤진 끝에, 스트립 클럽에서 이반을 찾아냅니다.
아노라는 이반이 이 ‘강제 이혼’을 막아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반의 입장은
“그럼 무슨 말을 할 건데? 너랑 나는 이 비행기를 타고 가서 이혼하는 것밖에 없어. ”
라는 대사로 정리됩니다.
이반은 아노라와 결혼까지 할 정도로 진심이었던 것 같지만, 부모님에게는 판단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 취급을 받을 뿐입니다.
또 그러한 대우에 대해 뭐라고 반항하지조차 못합니다.
아노라는 밑바닥 스트리퍼 출신이라 그나마 악다구니를 써 보거나, 아니면 어설픈 러시아어를 동원해 가족이 되고 싶다고 호소해 보지만 그녀의 행위도 그다지 의미는 없습니다.
밍크코트를 던지며, 이반의 엄마에게 일침하는 것 처럼 보이는 아노라는 이반의 아빠에게는 그저 웃음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결국 쓸쓸하게 귀가해 점차 재벌과의 결혼생활이라는 꿈에서, 이전에 살던 아파트 문 앞으로 돌아온 아노라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굳이 아노라의 내용을 가지고, 빈부격차, 양극화의 실상이라고 거창하게 떠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반과 아노라가 실제로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죽이 잘 맞고, 마음이 맞는 두 명이 결혼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아노라와 이반은 마음이 잘 맞는 비슷한 수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그렇다는 것이고 ‘가문’이 개입되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별 차이가 없어 보였던 둘은 이제 하늘과 땅 차이라고 부르기에 적절해집니다.
엄마에게 사과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이반.
재벌가를 상대로 후폭풍이 두려워서 제대로 된 이혼소송조차 하지 못하는 아노라.
이반은 여전히 스트리퍼를 만나고 다니면서 망나니처럼 살 것입니다.
아노라는 이 사건을 꽤 오래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평생 기억할 수도 있겠지요.
제 감상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P.S
한국에서 스트리퍼는 익숙한 직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트리퍼와 재벌 간의 만남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권에 있지 않아서, 아노라라는 영화를 ‘현실적’으로 생각하기 조금은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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